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디트 피아프 (문단 편집) == 생애 == 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Édith Giovanna Gassion)은 가난한 서커스 단원 아버지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서커스단 단원으로 한 몸 건사하기조차 벅차했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포주였던 자신의 어머니에게 에디트를 맡겼다. 어린 나이에 [[백내장]]에 걸려 실명 위기를 겪다가 7살 무렵에야 간신히 회복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한 탓에 키는 [[단신|142cm]]에 불과했고, 이것이 피아프(piaf), [[참새]]라는 뜻의 그의 별명의 유래가 되었다. 14살 때부터 어린 에디트 피아프는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를 유랑하면서 노래하며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다. 체계적인 훈련도, 타고난 미성도 얻지 못했던 그였지만, 그가 부르는 노래는 묘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한다. 하지만 유랑생활이 다 그렇듯이 벌이는 안정적이지 못했고, 간혹 돈이 다 떨어질 때면 그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던 시절로 회귀해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또한 열일곱에 첫아이인 딸 마르셀(Marcelle)을 출산했지만 아이는 2살의 나이로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에디트 피아프의 소문을 들은 클럽 르 제르니의 대표 루이 루플레라는 인물이 그에게 주급이 보장되는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가 얼마 뒤 살해당하면서 관계자였던 피아프는 졸지에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진범이 잡혔고, 풀려나온 그는 어느 새 퍼진 명성을 바탕으로 노래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오로지 노래 하나로 성공한 에디트 피아프였지만, 불행은 끊임없이 뒤를 따라다녔다. 성공한 뒤에도 교통사고를 네 번이나 겪었고, 평생 동안 가장 사랑했던 남자는 비행기 사고로 떠나보내야 했다. 에디트의 연인인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 1916-1949)은[* 본래 알제리 출신의 권투선수로, 일용 노동자 출신 아버지에게서 나서 미들웨이트급 세계챔피언에 올라 프랑스의 유명인이 되었다. 자식이 셋인 유부남이었으나 1948년 여름부터 에디트 피아프와 연인관계가 되었다.] 뉴욕에 있는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1949년 10월 28일 포르투갈 인근의 아조레스 제도에서의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후술하는 '사랑의 찬가(Hymne à l'amour)'는 바로 이 사고를 계기로 발표한 노래이다.[* 당시 이 비행기에는 천재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지네트 느뵈(Ginette Neveu)도 피아노 반주자인 오빠 쟝(Jean Neveu)과 미국으로의 연주 여행을 위해 탑승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출국 직전에 이들 - 마르셀 세르당, 지네트 & 쟝 느뵈 - 이 담소를 나누며 찍은 [[https://www.google.com/search?q=ginette+neveu+marcel+cerdin&tbm=isch&ved=2ahUKEwiDupzu8N3wAhVENqYKHQWFCmEQ2-cCegQIABAC&oq=ginette+neveu+marcel+cerdin&gs_lcp=ChJtb2JpbGUtZ3dzLXdpei1pbWcQAzIECCMQJ1CsZVjCaWDndGgAcAB4AIAB_QGIAaUFkgEFMC4zLjGYAQCgAQHAAQE&sclient=mobile-gws-wiz-img&ei=c0ipYMO0KcTsmAWFiqqIBg&bih=722&biw=1536|마지막 모습]]이 남아 있다. ] 이후 만난 어떤 애인은 연예계 경쟁자로 변모하고, 어떤 애인과는 폭력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었다. 에디트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그리스계 가수인 테오 사라포(Theo sarapo. 본명은 Theophanis Lamboukas). 1936년생으로 에디트 피아프와는 20살 차이였다. 에디트 피아프의 두 번째 남편이었으며 에디트와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1962년 결혼하였고 다음 해인 1963년에 에디트가 사망해서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게다가 에디트가 사망한 뒤 약 700만 프랑의 채무를 지게 되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테오 사라포는 1970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으며 에디트의 무덤 옆에 장례를 치뤘다. 말년의 에디트 피아프는 관절염과 불면증으로 수년간 다량의 약물과 알콜을 남용하여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또한 교통사고의 후유증도 있었다. 1951년에 교통사고로 팔과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진 후 모르핀과 알콜 중독에 빠졌고 중독 때문에 또 고생하였다. 이후에도 심한 자동차 사고를 몇 번 더 겪어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그래서 재활치료에 들어갔으나 결과는 신통찮았다. 1959년에는 위궤양으로 수차례 수술을 받았다. 간이 급격히 나빠졌고 수혈도 필요했다. 체중도 심각히 줄어 1963년에는 30kg밖에 되지 않았다. 수개월간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결국 1963년 10월 10일 프랑스 남동부 그라스(Grasse)에 있는 그녀의 빌라에서 간부전으로 인한 동맥류로 47세에 사망하였다. 시신은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